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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8
2012-01-27
2012-01-26
왜 우리는 벌써 4K에 주목하는가?
대표적인 예가 3D TV다. TV 제조사들은 2007년부터 프로젝터를 시작으로 3D 영상장비를 본격적으로 출시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2009년에 영화 ‘아바타’라는 걸출한 3D 영화가 등장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풀HD에 뒤를 잇는 차세대 해상도로 등장한 4K(4096x2160) 역시 대중화가 그리 오래걸릴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비록 지금은 소비자가 사거나 구할 수 있는 그 어떤 콘텐츠도 없지만 말이다.
■4K란 무엇인가?
4K는 풀HD의 해상도보다 가로 세로 각각 약 두 배씩 확장된 픽셀로 영상을 구현한다. 기존 풀HD가 1천920, 세로1천80개의 점으로 영상을 표현했다면, 4K는 가로 4천96개, 세로 2천160개의 점을 가지고 있다. 콘텐츠만 뒷받침된다면 보다 세밀하고 높은 화질을 구현할 수 있다.
전 세계 보급된 TV의 대부분은 4K는커녕 HD 화면에도 못미치는 SD급(720x480) 해상도를 가지고 있다. 반면 방송은 HD방송장비의 급속한 보급으로 인해 풀HD(1920x1080, 1080i) 영상을 송출한다. 블루레이라는 저장 매체도 대중화가 이뤄졌다. 덕분에 풀HD 해상도를 지원하는 대형 평판TV의 보급은 우리나라를 비롯 선진 시장을 중심으로 눈부시게 보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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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조사 사이에서도 4K는 아직 완벽한 표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동일하게 4K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최소 5개 이상의 상이한 해상도가 존재할 정도다. 단적인 예로 소니 소포츠는 일반적인 4K보다 세로 30픽셀이 더 많은(4096x2190) 픽셀을 채택하고 있다.
가정에서 주로 사용되는 HDMI 케이블은 공식적으로 2가지 4K 규겪을 지원한다는 점도 주목할만한 요소다. 하나는 앞서 설명한 4096x2190 해상도 이외에 풀HD와 같은 16:9 비율을 갖춘 쿼드HD가 있다.
■4K의 기원은 영화
4K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은 영화계다. 조지 루카스의 장편 영화 ‘스타워즈’ 중 나중에 만들어진 전편 3부작 은 마치 차세대 디지털 영상의 실험 무대와도 같았다. 그는 90년대 말 제작한 스타워즈 1편 ‘보이지 않는 위험’에서 최초로 부분적인 HD 촬영을 시도했다. 이후 2편인 ‘클론의 역습’에서는 완벽한 디지털 풀HD급 촬영을 시도했다. 특히 2편은 나중에 블루레이로 출시돼 가장 완벽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풀HD급 영상만으로는 거대한 극장 화면을 또렷하게 채우기 어려웠다. 실제로 극장 앞줄에서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다소 부드럽거나 혹은 계단 현상을 경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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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로 4K 해상도를 완벽하게 구현한 작품은 2007년에 제작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파이널컷’이다. 1982년작을 새롭게 4K 화질로 재탄생한 이 작품은 결국 상영관 문제로 인해 아주 적은 곳에서만 개봉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후 4K 상영관이 급속하게 생겨나기 시작했고 국내서도 대부분 극장들이 이러한 디지털 상영관을 갖추게 됐다.
3D 영화에서 4K 해상도는 더욱 현실감을 더한다. 이는 올해 CES2012에서 LG전자의 주장과도 같다. 4K 해상도로 제작된 영화 ‘아바타’가 집에서 보는 3D TV에 비해 생생함이 더 큰 것은 화면 크기의 문제 이전에 해상도가 차지하는 부분이 크다.
■ 4K 대중화 시점은 언제?
4K는 우선적으로 화면이 커야 한다. 미국의 한 업계 전문가는 영상장치가 4K 해상도를 TV가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화면 크기가 55인치 이상 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대다수 4K TV 제조사 역시 60인치 이상 제품을 내놓았다.
문제는 TV가 화면이 커질수록 판매가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현재 대중화된 LED 백라이트 TV 조차도 55인치 이상 고가 제품의 경우 여전히 수요가 제한적이다.
4K TV에 가장 적극적인 LG전자와 도시바는 연내 4K TV를 출시한다는 계획이다. 아직까지 제대로된 4K 콘텐츠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들 업체가 내세운 주요 구매 포인트는 기존 풀HD로 제작된 3D 영상을 4K TV로 시청할 경우 3D 영상의 사실감이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특히 LG전자의 필름편광패턴방식(FPR) 3D의 경우 4K TV에서 양안에 완벽하게 풀HD 해상도를 제공함으로써 논란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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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소니는 4K TV 제품 대신 가정용 4K 프로젝터를 내놓았지만 수요가 적어 주문 판매만 하고 있는 상황이다. JVC는 지난해 기존 풀HD 해상도 콘텐츠를 4K로 업스케일 할 수 있는 프로젝터를 선보였지만, 반대로 4K 해상도를 가진 콘텐츠는 재생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TV 제조사들의 입장이 상이한 것은 바로 4K 콘텐츠 부족 문제에 기인한다. 4K 해상도를 일찌감치 받아들인 영화 정도가 그나마 기대해볼 수 있는 유일한 콘텐츠지만 한계점도 만만치 않다. 여전히 기본 해상도로 촬영되는 영화들이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4K 영화가 가진 막대한 데이터를 옮기는 저장 매체와 이를 재생할 수 있는 장치도 여의치 않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장비를 모두 교체해야 하는 방송 역시 수년안에 4K 방송에 돌입하기는 쉽지 않다. 게임은 제작비 문제로 인해 아직까지도 풀HD 해상도 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TV 제조사들이 시장 확대를 통해 4K 콘텐츠 양상을 얼마나 이끌어낼 수 있을지가 현재로써는 가장 큰 숙제다. 그러나 전례를 보면 그리 불가능해보이지만은 않는다.
3M 연구소 데이브 램 박사는 “4K는 수확 체감점에 와있다”며 “현재 풀HD와의 간극이 너무 넓은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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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6
IBM, 공기로 전기 발생하는 배터리
美씨넷은 13일(현지시간) IBM연구소가 리튬에어배터리를 실험실에서 테스트하는 과정에 있다고 보도했다. IBM연구소가 배터리500프로젝트를 통해 개발 중인 이 배터리는 중금속 탄소산화물을 산소와 반응시켜 전기를 발생하는 원리를 사용한다.
씨넷에 따르면 이 제품은 기존 리튬이온배터리보다 1천배 많은 에너지를 집적할 수 있다. 그러나 높은 불안정성이 그동안 문제로 지적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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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은 내년에 시제품을 선보인 뒤 2020년경에 실제로 기술이 탑재된 제품을 상용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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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XT 이후 15년
RoughlyDrafted Magazine
Daniel Eran Dilger in San Francisco
Apple’s 15 years of NeXT
December 21st, 201115년 전, 애플은 넥스트 소프트웨어 인수를 발표했었다. 결국 20년 전 공동창립했던 회사로 스티브 잡스를 복귀시킨 인수였다.
애플의 넥스트 인수 이후 15년이 흘렀고, 애플은 이제 완전히 기업으로서 재탄생하였다. 넥스트 출신의 간부진과 엔지니어를 포함하여 잡스가 이끄는 새로운 경영팀이 완전히 새롭게 애플을 바꾸는 동시에 넥스트의 신기술과 방향을 얻어내면서 말이다.
NeXT before Apple
애플이 넥스트를 인수하기 이전, 넥스트 소프트웨어는 1993년 하드웨어 사업을 갑자기 철수한 이래 자신의 진보적인 운영체제 기술을 어떻게 판매할 수 있을지 힘든 해를 보내고 있었다. 이미 넥스트는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넥스트 컴퓨터 시장을 충분히 확보하는데 실패한 바 있었다.
소프트웨어 회사로서 3년을 거친 넥스트는 선(후에는 HP)과 파트너쉽을 맺어 오픈스텝(OpenStep) 계획을 발표했다. 오픈스텝은 넥스트스텝 운영 및 개발환경상에 구축해 놓은 개방형 스펙으로서, 선의 솔라리스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NT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운영체제상에서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선과 HP 모두 결국 넥스트와의 파트너쉽에서 물러나게 된다. 선은 자바에 집중하고 HP는 애플과 IBM의 탈리전트(Taligent)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탈리전트는 넥스트 기술을 그대로 복제한 기술 프로젝트였다.

넥스트는 또한 넥스트스텝의 객체지향 개발툴로 다이나믹한 웹 애플리케이션 개발을 위해 사용하는 툴인 웹오브젝트(WebObjects)도 개발했다. 잡스는 웹오브젝트를 넥스트의 핵심 자산으로 여겼다. 특히 마이크로소프트가 점차 지배해가고 있는 시장에서 써드파티 대안형 운영체제를 팔 효율적인 방법으로서 웹오브젝트를 택했기 때문이다.
Apple before NeXT
1996년, 애플은 이제 윈도 외에 살아남은 유일한 주요 컴퓨팅 플랫폼이었고, IBM의 OS/2와 선의 솔라리스, BeOS, 넥스트스텝과 같은 대안형 라이센스 OS와는 달리 직접 매킨토시 하드웨어를 판매했기 때문에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안형 라이센스 OS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적인 라이센스 계약에 종속적인 PC 시장에서 충분한 수의 구매자와 개발자를 끌어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 남아 있다고는 해도, 애플의 상황 역시 좋지 않았다. 원래의 매킨토시 운영체제를 현대화시키려는 애플 스스로의 노력은 실패했고, 컴퓨터 업계에서도 지위를 잃어가고 있었다. 애플은 IBM(후에는 HP)과 연합하여 넥스트스텝-류의 시스템인 탈리전트를 개발하고, 스스로도 코플랜드 운영체제를 시도했지만 그 어떠한 노력도 실제 제품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애플은 아직 실험적인 운영체제였지만 매킨토시 라인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Be와 협상을 시작했다. 단 BeOS가 맥 하드웨어에서 이미 돌아갈 수는 있었지만, 기존 맥오에스의 대체용으로 팔 수 있는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고 출력 아키텍쳐와 같은 핵심 기능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애플을 되살리기 위해 영입됐던 당시 애플 CEO인 길 아멜리오(Gil Amelio)는 넥스트를 조사했다. 급속도로 나이를 먹어가는 맥오에스를 대체할 완성되고 입증된 데스크톱 OS로서, 또한 관련 개발툴인 웹오브젝트와 적당한 기업시장을 갖고 있는 곳이 넥스트였다.
당시 맥 사용자들은 넥스트보다 Be에 더 친숙했다. BeOS의 소비자/취미가를 향한 집중도 그렇지만 잡스가 애플을 떠난 이후 애플이 넥스트의 소비자시장 진출을 계약으로 막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잡스는 애플을 나갈 당시 주요 애플 엔지니어를 같이 데리고 나갔었다. 하지만 아멜리오는 넥스트를 확신했다. 1년 정도면 "랩소디" 전략상 넥스트스텝을 돌리는 맥을 출하할 수 있으리라고 봤다.
Apple + NeXT
1996년 12월20일, 애플은 4억 2,900만 달러의 현금과 150만 주를 잡스에게 주고 넥스트 인수를 발표하여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더군다나 잡스도 인수 이후 애플에 고문으로 들어왔고, 넥스트의 웹사이트는 애플의 인수를 "합병"으로 묘사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에 지배받는 개인용 컴퓨터 업계는 넥스트 인수 후에도 애플을 주요 업체로 취급하지 않았다. 애플이 재빠르게 넥스트스텝 운영체제를 새로운 맥오에스로 만들고, 옐로박스 레이어로 오픈스텝을 전환시키겠다는 전략을 발표되자, 심지어 넥스트의 기존 고객들조차도 애플을 피했었다.
특히 웹오브젝트를 자사 온라인스토어에 채용하고 있던 델은 넥스트와의 기업관계를 청산하고, 마이크로소프트와 협력하여 새로운 온라인스토어를 구축했다. 선과 HP 또한 넥스트와의 오픈스텝 파트너쉽을 포기했다. 결국 넥스트 기술에 대한 애플의 지원이 상업적으로 지속 가능하리라 본 기업은 거의 없었다.
애플은 보다 심각하고 복잡한 유닉스-기반 운영체제의 채택을 맥 사용자들이 주저하자, 목표를 바꿨다. 상황은 더 안 좋았다. 어도비와 매크로미디어, 마이크로소프트 등 주요 맥 개발사들이 옐로박스에 대해 거의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고, 그들은 기존 코드에 최소한의 변화만 거쳐도 돌릴 수 있는 뭔가 현대적인 기술을 애플이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완벽한 파트너로 보였던 애플의 넥스트 인수가 엉망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애플은 하드웨어 업체와의 맥오에스 라이센스 계약에 묶여 있기도 했다. 맥오에스 라이센스는 클론 업체들이 매상을 올리면서, 기존에 의도했던 맥 시장 확장보다는 OS만 줘버리고 하드웨어 이윤을 잃는 효과를 가져왔었다.
애플은 또한 양판점에서 싸구려 PC 옆에 아무런 차이 없이 애플 컴퓨터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경쟁력이 분명한 제품이 없으면 팔 방법이 없으며, 개발자들을 끌어모아 유지할 수도 없는 상황, 앞이 안 보이던 때였다. 매킨토시의 전망은 꽤 암울해 보였다.
매킨토시 외 유일한 주요 제품으로는 뉴튼 메시지패드가 있었다. 태블릿 컴퓨터였던 뉴튼은 훨씬 단순하고 저렴한 팜 파일럿(Palm Pilot)에게 추월당하고 있는 중이어서 애플의 관심과 노력이 상당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Jobs turns Apple around
넥스트 인수 다음 날, 잡스는 이런 글을 쓴 바 있다. "10년째 되면서 매킨토시에 의지해온 산업이 느리게나마 맥의 혁명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베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혁신이 필요하며, 애플보다 이런 혁신을 더 잘할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컴퓨터 산업을 애플 말고 누가 이끌었습니까? 처음에는 애플 II, 그 다음에는 매킨토시와 레이저라이터를 선보인 곳이 애플입니다. 이번 합병을 통해 넥스트의 진보적인 소프트웨어와 애플의 매우 거대한 하드웨어 플랫폼과 마케팅 채널이 만나 기존 플랫폼을 혁명적으로 뛰어 넘고 향후 10년 이상 애플과 업계의 따라쟁이들을 부추킬 것입니다. 애플에 대해 대단히 깊은 감정을 지금도 갖고 있고, 덕분에 애플의 미래를 구성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처음, 애플 경영권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던 잡스는 1997년 7월, 여름 맥월드에서 자신이 아멜리오 후임자를 찾을 때까지 임시 CEO를 맡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사실 아멜리오 축출을 이끈 장본인은 잡스였고(1997년 맥월드 엑스포에서는 둘 다 모습을 드러냈었다), 아멜리오가 내린 결정사항들을 곧바로 뒤엎기 시작했다. 이 중에는 아멜리오가 분사시켰던 뉴튼도 들어 있었다. 잡스는 뉴튼을 새로이 애플의 산하 부서로 편입시켰었다. 당시 잡스는 애플 제품 라인업을 단순화시켰다.

잡스가 없앤 것 중 큰 건 중에는, 진보기술그룹(Advanced Technology Group: ATG)이 있다. 이 그룹은 QuickTime TV와 QuickDraw 3D, OpenDoc, HotSauce, Macintalk 음성인식, 뉴튼 필기인식 등 돈을 전혀 벌지 않는 제품을 무수히 많이 만들어낸 곳이었다. 잡스는 또한 클론 업체와의 계약을 종료시켜서 매킨토시의 운명을 애플이 통제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여러가지 시험삼아 하는 프로젝트를 없애고, 뒤얽힌 영업망의 강화를 위해 컴팩으로부터 팀 쿡을 영입한 잡스는 웹오브젝트를 사용하여 델이 포기한 것과 유사한 온라인스토어를 만들어냈다. 덕분에 애플은 사용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개별사양"으로 맥을 팔 수 있게 됐다.
또한 잡스는 여러가지 매킨토시 제품도 없애거 기본적으로 타워형과 노트북 G3만을 남겼고, 여기에 새로운 아이콘으로서 아이맥을 추가시켰고, 1999년에는 소비자용 아이북 노트북도 선보였다. 새 하드웨어를 발족시키면서 잡스는 클래식 맥오에스에도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었다. 넥스트스텝에 기반한 맥오에스텐을 작업하면서도 코플랜드 프로젝트에서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살려서 맥오에스의 업데이트를 행했기 때문이다.

한편 잡스의 애플은 맥 판매를 증대시키기는데 집중했다. 애플 고유의 소매점을 짓기 시작하면서 주요 소프트웨어 개발사를 인수하여 프로 앱 패키지를 만들고, 아이라이프와 아이웍 등 소비자용 제품도 만들었다.
Apple goes open
애플 고유의 소프트웨어 개발에 더해 넥스트-중심적인 개발팀은 맥오에스텐의 코어 유닉스 OS 파운데이션을 다윈이라는 이름의 오픈소스 프로젝트로 공개하겠다고 발표했다. 애플 자신의 개방형 코드와 더불어 애플은 OpenGL(퀵드로 3D를 대신한다)과 같은 공개사양의 채택으로부터 CUPS(맥오에스텐과 무료 유닉스, 리눅스 배포본이 사용하는 개방형 출력 아키텍쳐)의 매입 및 지속적인 관리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프로젝트의 오픈소스 개발에 자금을 대기 시작했다.
애플은 또한 오픈소스 웹킷 프로그램을 토대로 고유의 사파리 웹브라우저를 만들기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인터넷 익스플로러로부터 웹의 권력 균형을 오픈소스 쪽으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넥스트스텝의 BSD 유닉스 코어에 대한 오픈소스 전략과 더불어 웹킷은 제일 유명한 웹브라우저 엔진이 됐고 특히 휴대용 기기에서는 유일한 주요 브라우저에 올라섰다.
애플은 GNU/Linux의 GNU 컴파일러 컬렉션 개발 툴체인(toolchain)을 진보적이고 새로운 LLVM 컴파일러 아키텍쳐로 완전히 교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LLVM은 어배너-섐페인(Urbana–Champaign)의 일리누이 대학교에서 개발중인 아키텍쳐로서 BSD 스타일의 오픈소스로 제공됐고, 애플은 여기에 LLDB와 Clang을 추가시켰다. 이로써 애플은 유닉스-류 소프트웨어의 미래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OpenGL 지지와 함께 애플은 GPU 하드웨어를 사용하여 일반적인 목적의 고속처리를 돌리기 위한 OpenCL 사양을 만들어냈다. OpenCL은 그래픽 업체의 지지를 받기 위해 중립적인 중개자의 역할을 갖고 있기도 하다. 애플은 한편 인터넷 파일과 달력, 주소록과 연동하는 공개표준으로서 WebDAV와 CalDAV, CardDAV의 발전에 주된 역할을 했다.
추가적으로 애플은 개방형 오디오재생을 자가 고유 표준으로 바꾸려 시도했던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의 계획을 물리쳐 그동안 굳게 닫혀 있던 MP3와 AAC, MPEG H.264 오디오 스트리밍 및 비디오 인코딩, 배포세계를 열었다. 마찬가지의 노력으로 어도비 플래시의 스트리밍 비디오 장악노력도, 애플은 시장력을 동원하여 플래시의 통제를 깨고 비디오를 모두에게 열어주었다.
Jobs' golden decade of Apple
넥스트를 인수한지 5년이 지난 2001년, 애플은 최초의 소매점을 열고 맥오에스텐의 첫 번째 빌드를 출하했으며, 아이포드를 발표하여 소비자 가전 시장으로 진입하는 강수를 뒀다. 아이포드 자체는 애플 컴퓨터사에서 '컴퓨터'를 빼버리는 역할을 할 정도로 애플의 사업에 지극히 중요했다.
잡스는 여러가지 디바이스의 중심에 아이맥을 놓는 디지탈허브 전략을 제시했다. 맥오에스텐의 코어 기반을 개선하고 하드웨어를 끊임 없이 진보시키는 애플이 2000년대 내내 채택한 전략이었다.
2000년대 중순, 잡스는 PowerPC에서 인텔로의 이주를 단행했다. 이로써 맥 사용자도 윈도를 돌릴 수 있었고, 덕분에 윈도와 계속 어울려야 하는 기업 사용자 등도 맥을 사용할 여지가 생겨났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애플은 태블릿 컴퓨터 개발에 돌입하였고 결국 2007년에는 아이폰이라는 결과를 냈다. 아이폰은 미니 버전의 맥오에스텐으로서 iOS라 불리었고, 매킨토시 자체보다도 더 큰 규모로 자라났다.
2010년, 잡스는 대성공을 거둔 아이폰이 닦아 높은 길을 통해 태블릿 컴퓨터인 아이패드를 적절한 가격에 선보였다. 아이폰의 경쟁은 심해졌지만 아이폰은 시장을 깊게 형성시켜서 기존 업체를 모두 당혹스럽게 만들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으로 제일 잘 팔리는 휴대폰 중 하나가 됐다. 예전에 아이포드가 그러했듯 아이패드는 자신의 시장을 크게 형성시켰다. 이전까지는 어느 경쟁자도 형성시키는데 실패했던 시장이었다.
2001년부터 2010년 사이 애플 주가는 주당 $10에서 $315로 뛰어 올라 전세계에서 제일 가치가 높은 기업이 됐으며, 수입은 물론 이윤도 제일 많이 벌어들였다. 애플은 컴퓨팅에만 한정돼 있던 상황에서 벗어나 아이포드와 아이튠스에 연동되는 음악과 영화시장을 탈바꿈시키고 휴대폰 업계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으며(이제 남아 있는 유일한 경쟁자는 스스로를 무료로 푸는 오픈소스 프로젝트밖에 없다), 최초로 성공한 태블릿인 아이패드를 통해 새로운 휴대기기 시장을 선보였다.
A world without Apple's NeXT
15년 전 인수했던 넥스트가 없었다면 잡스의 주도와 창조성, 비전도 없었을 것이다. 애플 컴퓨터는 90년대에 인수되거나 어쩌면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며, 매킨토시는 아미가와 동급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개인용 오디오 시장 또한 마이크로소프트와 PlaysForSure 시스템의 지배를 계속 받으며 음반사의 변덕 하에 CD로 굽는 것만 해도 제한이 여전했을 것이다.
맥오에스텐이 없었다면 마이크로소프트는 여전이 윈도 2000 버전만 내놓았을 것이며, 윈도 비스타나 윈도 7, 그리고 진보적인 GPU 주도의 그래픽엔진도 없었을 것이다. 맥오에스텐의 쿼츠 컴포지팅이라는 애플의 개척적인 노력의 산물이 GPU 위주의 그래픽엔진이었다.
아이폰이 없었다면 사용하기 쉬운 터치스크린 휴대기기도 안 나오고, 그 대신 아이폰 이전의 안드로이드와 유사했을 것이다. PalmOS와 윈도모바일, 블랙베리의 버튼-중심적인 휴대폰만 있을 것이며 4년 전에 그랬던 바 처럼 세상을 바꾸지도 못했을 것이다. 태블릿 또한 안 나왔을 일이다. 맥북에어와 같은 울트라북에도 딱히 노력이 없었을 테고, 그저 여러가지의 저렴하고 저품질의 넷북만이 나와 있을지도 모를 법 하다.
노키아와 마이크로소프트, 닌텐도, 소니, 팜, HP, 어도비 등은 도전받지 않은 채, 개선에도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모바일/데스크톱 플랫폼을 위한 저가형 앱스토어를 나서서 만들 일도 없으며, 구글은 여전히 웹브라우징만 할 수 있을 저가형 노트북에 집중했을 것이다. 이들은 현재 지위가 하락중이며 기술업계에서 자신이 어째서 실패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실패를 멈출 수 있을지를 모르고 있다.
What's next for Apple
2011년, 세상은 애플과 넥스트의 창립자를 잃었다. 잡스는 자신의 비전에 멀어져 있던 애플을 고쳐냈고 기술과 인문 사이의 교차점에서 위대함을 다시 이끌어낼 수 있는 팀을 만들어냈다. 잡스는 애플 경영팀만이 아니라 전세계 어느 업체에서건 추종을 받을만한 분명한 업적을 남기고 떠났다.
애플은 기업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다. 전세계 소매점도 잘 돌아가고 있고 모바일과 데스크톱 제품에서 강력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으며, 풍부한 현금으로 최첨단 연구개발도 벌일 수 있다. 15년 전에는 볼 수 없던 풍경이다.
그러나 현재의 애플은 자신의 실패와 실수를 알아볼 능력도 갖고 있다. 지난 15년간 애플은 설사 전략이 올바르다 하더라도 돈을 잃었던 난관을 돌파해 왔다. 엑스서브와 엑스서브 RAID, Xsan으로 서버시장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단순히 훨씬 저렴한 대안만 제공하는 것 가지고서는 손수 고객서비스와 지원을 요구하는 시장을 충족시켜줄 수 없었다.
애플은 잘못됐음을 알고 물러나는 것 또한 올바름을 알고 성공을 거두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애플은 마찬가지로 주류시장을 공략할 강력한 기능을 제공하는 선에서 프로앱스의 규모를 축소시켰다. 소수의 전문가 사용자들은 특별한 개발사가 더 잘 보조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애플 경영진은 애플이 뭘 안 할 줄 안다고 매번 되풀이해 말하고 있다.
딱 15년 전의 애플은 아니라고, 맞다고 말할 수 없었으며 계획을 실천한다거나 투자자에게 자신을 믿어달라 확신을 주지도 못했다. 지난 15년은 창립자를 재발견하여 그의 비전에 따라 업계를 재편성한 놀라운 기간이었다.
Daniel Eran Dilger is the author of “Snow Leopard Server (Developer Reference),” a new book from Wiley available now from Amazon as a paperback or digital Kindle download.Apple’s 15 years of NeXT — RoughlyDrafted Magazine
2012-01-05
왜 이근안만... 정형근 이사장님, 섭섭하시죠?
한국현대사에서 '고문'을 거론하면 연상되는 인물이 셋 있습니다. 일제 치하와 해방 공간에서는 노덕술, 5공 시절에는 이근안, 6공 시절에는 정형근 전 의원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로부터 고문을 당한 피해자들에게는 마치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 하나 자신의 고문행각에 대해 제대로 된 사죄나 참회를 한 적도 없고, 특히 노덕술과 정형근은 응당한 죗값을 치르지도 않았습니다. 역사는 이들을 '고문기술자'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들 3인의 행적은 우리 현대사의 '고문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또 부상자(?) 치료를 핑계로 이들 곁에서 고문을 묵인, 협력한 '불의한 의사'들의 반인륜적인 행위 또한 묵과해선 안 될 것입니다.
[노덕술] 곤봉 휘둘러 피의자 숨지게... 보석 석방 후 무죄 선고

1948년 7월 26일, 정부수립을 20여 일 남겨둔 시점에서 대형 고문사건이 터져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세칭 '수도청 고문치사사건'이 그것인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그해 1월 24일 발생한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저격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함북 무산 출신의 박성근을 혐의자로 체포하여 중부경찰서에서 취조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수도청 수사과장으로 있던 노덕술이 취조실로 찾아와 박성근에게 곤봉을 휘두르며 자백을 강요하였는데 박성근이 고문 끝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당황한 노덕술은 박성근의 시신을 한강에 버리라고 지시한 후 수도청 부청장 김태일의 도움을 받아 급히 몸을 숨겼습니다.
도망을 다니던 노덕술이 붙잡힌 것은 이듬해(1949년) 1월 25일 새벽이었습니다. 그해 1월 8일 친일기업인 박흥식 검거를 시작으로 활동을 개시한 반민특위가 그를 서울 시내에서 검거한 것입니다.
검거 당시 노덕술은 무기를 소지한 채 경찰관 4명의 호위를 받고 있어 또 다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노덕술은 도피 중에도 권력층의 비호를 받고 있었는데, 그가 구속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에 노덕술을 풀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지지부진한 재판 끝에 노덕술은 7월 23일 만성기관지염 등 다섯 가지 병명을 이유로 공탁금 10만 원을 걸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무죄가 선고되었으며, 이후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1899년 경남 울산 장생포에서 태어난 노덕술(창씨명 松浦 鴻)은 1920년 순사교습소를 마치고 그해 경남 경찰부 보안과 순사로 경찰에 입문하였습니다. 일제 당시 그는 경남지역 여러 경찰서의 보안과, 고등계, 사법계 등에 근무하면서 주로 사상범, 즉 항일투쟁가들을 다뤘습니다. 말하자면 독립운동가 때려잡은 일제 앞잡이인 셈입니다.
동래경찰서에 재직 중이던 1928년 10월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및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 박일형을 체포하여 고문했으며, 그해 겨울에는 반일단체 '혁조회' 관련자 김규직, 유진흥 등을 체포해 고문했는데 김규직은 고문 후유증으로 1929년 말 옥사했습니다. 이밖에도 그는 동래·통영경찰서 사법주임 시절 수차례 반일단체 탄압에 나섰으며, 일제 말기 평남 보안과장 시절에는 전쟁협력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근안] '얼굴 없는 고문기술자'... 김근태 전 의원에 의해 세상에 공개

"남영동에서 20여 일간 고문을 당하는 동안 '그'는 항상 핏발 선 눈빛이었고, 90kg이 넘어 보이는 거구로 칠성판 위에 묶고는 깔고 앉아 목을 조르고 물고문, 전기고문, 발바닥 구타 등을 쉼 없이 했다." - 전노련 사건 고문피해자 박문식씨 증언(<한겨레> 1988. 12. 21.)
"시멘트 바닥에 3시간 가량 무릎을 꿇려 놓았다가 자신의 무릎으로 허벅지를 찍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은 일도 있었다. '그'는 항상 눈에 핏발이 서 있었으며, 칠성판을 자신이 발명했다고 자랑하기도 했었다." - 김태홍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증언(<동아일보> 1988. 12. 22.)
'그'로부터 고문을 당한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그'의 눈엔 핏발이 서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90kg이 넘는 거구에 칠성판을 발명한 고문의 대가 '그'. '그'는 이 별명 외에도 '성명불상자', '반달곰', '고문기술자' 등으로도 불렸는데 그가 바로 5공 시절 고문왕 이근안 전 경감입니다.
이근안은 치안본부(경찰청 전신) 남영동 대공분실에 근무하면서 각종 시국사범들의 고문수사를 지휘해온 장본인입니다. 이근안은 "민주화가 되면 너희들이 나를 고문해라"고 말했을 정도로 파렴치할 뿐더러 목사가 된 지금 다시 '공안목사'라는 딱지를 달고 있습니다. 고문경찰관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의 인생역정을 한번 더듬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근안은 공군 헌병 출신으로 1970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했습니다. 1972년부터 대공(對共) 분야에 근무하게 된 그는 매번 특진으로 승진을 거듭해 1984년 경감에 올랐습니다. 고문혐의를 받고 잠적할 때까지 그는 근무기간 대부분을 대공분야에 몸담은 이른바 '공안통'이었는데, 재직기간 중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은 바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간첩검거 유공이 4회, 1979년 청룡봉사상(조선일보사 시상), 1981년 내무부장관 표창, 1982년 '국가안보 기여'로 9사단장 표창, 1986년엔 대통령으로부터 옥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받은 표창의 이면에는 무수한 고문 피해자들의 피울음과 절규가 서려 있는 셈이라고 하겠습니다.
한동안 '얼굴 없는 고문기술자'로 불리던 이근안은 그가 고문했던 고 김근태 전 의원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1988년 6월 30일 특별가석방으로 풀려난 김 전 의원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6차례에 걸쳐 자신을 고문한 '이름 모를 전기고문 기술자'가 이근안임을 밝혀냈습니다. 김 전 의원은 이재오(서울민중연합의장, 현 한나라당 의원), 이선근(전노련 사건 관련자), 박문식씨 등 3인을 통해 사진 속의 인물이 자신들을 고문한 이근안임을 확인한 것입니다.
김 전 의원의 제보를 받은 문학진 <한겨레> 기자(현 민주당 의원)의 끈질긴 추적 끝에 <한겨레>의 특종보도(1988. 12. 21.)를 통해 비로소 이근안의 얼굴이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그의 신상이 확인되자 고문피해자들은 그를 불법체포 및 고문 혐의로 정식 고발하였고 그는 마침내 수배되었습니다.
세상에 얼굴이 알려지자 이근안은 곧바로 잠적하였습니다. 그러나 검경은 그를 체포하는 데 미온적이었습니다. 경찰은 검거 노력은커녕 오히려 그가 은신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당시 치안본부 5차장이던 박처원 치안감과 동료 경찰관들은 조직적으로 그를 비호하였습니다. 특히 박처원은 도피 중인 이근안에게 1500만 원을 생활비 조로 지급하였으며, 수배 중인 그가 퇴직금까지 받아가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992년 가을 당시 김수현 전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반장은 이근안의 집으로 찾아가 숨어 있던 그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집 벽장에서 숨어 지내던 이근안은 1999년 10월 28일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자수하였고, 1999년 11월에 구속 기소되었습니다. 2000년 9월 대법원에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이 확정되었는데, 그가 저지른 악행에 비하면 비교적 가벼운 것이랄 수 있습니다.
2006년 징역 7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그는 돌연 성직자로 변신하였습니다. 도피 시절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그는 옥중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측 총회신학교 통신신학부 4년 과정을 이수한 후 2008년 10월 30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다음 '아고라'에서 그의 목사 안수 취소 움직임이 이는 등 반발도 적지 않았습니다.
김근태 전 의원 타계를 계기로 그의 근황을 전하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는데, 작년 12월 31일자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그는 2010년부터 각종 언론 인터뷰에 응해 과거 자신의 행적을 정당화하는가 하면, 목사라는 신분을 이용해 대외활동에 나서 안보태세를 강조하는 등 과거 공안수사관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공안수사관'서 '공안목사'로 변신한 셈입니다.
[정형근] 고문 혐의 피소만 10건... 3선 국회의원 출신으로 '떵떵'

1986년 12월 크리스마스 이브 전인 22일경, 정형근 당시 대공수사단장이 고문을 받고 있던 내 앞에 나타났다. (줄임) 부하들이 순식간에 양쪽으로 3명씩 일렬로 서 차렷 자세로 허리를 굽히자 정형근은 이들을 향해 "뭣들 하고 있는 거야! 15일이 다 돼가는데, 아직도 간첩이라고 불지를 않아?"하며 소리를 쳤다.
정형근은 담배연기를 한 모금 내뿜더니 "심진구, 이제는 간첩이라고 불 때가 됐는데. 여기 잡혀오면 15일 이내에 다 불지 않는 사람은 없어. 여기가 어딘 줄 알아? 국회의원도 잡아다 줘 패는 곳이야. 간첩이라고 한 마디만 하면 돼. 그러지 않으면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해. 죽어. (줄임) 너 북에 갔다 왔지?" 하면서 "간첩 소리 나올 때까지 더 족쳐!"라고 말했다. 그러자 실장과 대머리에 눈이 치켜 올라간 부하가 몽둥이로 내 가슴을 후려쳤다. - 심진구, <"간첩 소리 나올 때까지 더 족쳐!">(<오마이뉴스> 2004. 12. 20.)
5공 시절 고문왕으로 이근안이 유명했다면 6공 들어서는 정형근 전 한나라당 의원의 이름이 자주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심진구씨를 비롯해 민족민주혁명당 사건 관련자 하영옥씨 등은 정형근이 고문 현장에 나타나 고문을 지시하거나 혹은 고문수사관들을 격려하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한 바 있습니다.
또 민족해방애국전선 사건 관련자 양홍관씨는 2004년 12월 14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정형근으로부터 '성기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고문 사실을 증언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정 전 의원은 이같은 주장에 대해 한결같이 부인으로 일관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인에도 그가 고문에 가담했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2001년 1월 30일 검찰은 이른바 '서경원 의원 밀입북사건'과 관련, 당시 야당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씨로부터 북한 공작금 1만 달러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최종 결론을 내리면서 과거 검찰수사가 조작됐음을 시인했습니다. 검찰은 또 당시 서씨의 진술이 수사당국의 고문 등 강압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드러났다고 설명하면서 서씨를 고문한 사람은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이었던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라고 밝혔습니다.(<경향신문> 2001. 1. 31.)
정형근이 서씨를 고문했다고 안기부 직원이 직접 증언한 바도 있습니다. 그 직원은 "정(형근) 국장이 고성을 지르는 소리가 (조사실) 밖으로 새나왔으며 조사를 마친 뒤 들어가 보니 서 전 의원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돼 있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습니다.(<한겨레> 1999. 11. 20.)
안기부 재직 시절 고문 혐의로 그는 10건 가까이 피소됐으나 그는 용케도 법의 심판을 비켜갔습니다. 그는 무려 23차례나 검찰의 소환통보에 불응하였고, 마침내 검찰은 그에 대한 긴급체포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직 국회의원 신분이어서 한나라당의 강력한 비호로 번번이 실패한 나머지 수사는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1983년 안기부 법률담당관으로 자리를 옮긴 후 그는 안기부 요직(대공수사국장, 기획판단국장, 수사차장보, 제1국장, 제1차장)을 거쳐 1996년 당시 신한국당(한나라당 정신) 공천을 받아 부산에서 3선을 하였으며, 이명박 정부 출범 후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을 지낸 뒤 지금은 뉴라이트전국연합 의장으로 있습니다. 수많은 고문의혹에 휩싸여온 그는 1999년 제네바 유엔인권위원회에 참석해 국내 인권단체들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는데, 대체 그가 생각하는 '인권'은 어떤 것일까요? 설마 고문수사는 아니겠지요?
[불의한 의사들] 고문 상처 은폐·진단서 조작... 또 다른 부역자들
1999년 3월 브라질 의사협회는 의사들을 상대로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1964년~1985년까지 군사독재시기에 정치범을 상대로 고문에 참여한 의사들의 면허취소를 위해 개최한 청문회였습니다. 당시 군사감옥에서 일했던 26명의 의사가 그 대상자였습니다. 대상자 가운데 쿠틴호(당시 58세)라는 의사는 1969년 정치범 11명의 고문을 감독한 책임으로 기소되었습니다. 일부 의사들은 정치범들의 사망원인을 허위로 기재한 진단서에 서명한 혐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칠레 의사회는 군사정권의 불법행위에 대해 '고문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의사는 누구든 고문에 협조하지 말 것"을 촉구하고 만약 부득이 고문에 협조했다면 이를 의사회에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마르코스 정권 말기의 필리핀에서도 칠레와 비슷한 인권탄압의 상황이 있었는데, 필리핀 의사회 역시 고문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독일 나치점령 시절 강제수용소에서 의사들이 고문이나 인체실험에 가담했다가 나중에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는데, 아우슈비츠에서 악독한 인체실험을 한 '죽음의 천사' 요제프 멩겔레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위에서 보듯이 의사가 고문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계된 경우는 적지 않은데 이는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안기부나 보안사, 치안본부 등에서 고문자들이 고문을 하다가 사고가 나거나 고문으로 난 상처를 송치 직전에 속히 치유하기 위해 의사의 도움을 받은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또 의사들이 진단서에 허위사실을 기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고문 은폐에 도움을 준 사례도 있습니다. 안기부나 보안사에는 전담의사가 상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체격이 건장한 남자로부터 눈과 얼굴을 얻어맞아 눈의 실핏줄이 모두 터져 온몸이 새빨갛고 얼굴이 퉁퉁 부었을 때 의사가 왔었다. 그는 피로 물든 내 눈을 모자 '특별한 약은 필요 없고 시간이 가면 낫는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의사를 보고 고문자들에게보다 더 소름이 끼쳤다. 약을 날라다주던 한 직원마저 '마치 6·25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다'고 말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 서울노동운동연합사건 서혜경 피고인 진술, 1987년
의사가 "아픈 데는 없느나"면서 여기저기 쿡쿡 눌러 봐요. 간호사 아가씨에게 저쪽으로 가라고 한 뒤에 내 낭심도 보고.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주 무서운 거더라구요. 의사가 "운동을 하느냐"고 물어서 "고등학교 때 유도 조금 했다"고 했더니 옆에 있는 수사관한테 "제법 단단한데 좀 다뤄도 괜찮겠다"고 그러는 거예요. 좀 패도 괜찮다는 말이었지. - '총풍사건' 장석중씨의 진술(<신동아> 1999년 4월호)
고문을 당해 눈 실핏줄이 모두 터지고 얼굴이 퉁퉁 부은 피해자를 보고 '별것 아니다'라거나 고문현장을 일컬어 마치 전쟁터의 야전병원 같다고 말하는 의사. 몸이 건강하니 좀 때려도 괜찮겠다며 고문 강도를 조언해주는 의사. 대체 이들도 의사가 되면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을까요? 백색 의사 가운을 입고서 인술을 펼쳐야 할 이들이 고문 협력자로 전락한 것은 대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비단 이뿐만이 아닙니다. 한 외과의사는 브라질 의사처럼 진단서를 허위로 기재하기도 했습니다.
진도간첩단사건 연루자 석달윤씨는 전남도경의 조사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당해 전신이 푸른 상처로 얼룩져 있었고, 특히 가슴 부위는 몽둥이로 찔려 숨을 쉬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조사과정에서 그가 구타를 당한 끝에 졸도하자 경찰은 급히 석씨를 (광주) 시내 대인동 소재 안정남외과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 의사 안정남은 석씨를 진찰한 후 상처 부위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은 채 위궤양으로 4주간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진단하였습니다.(진도간첩단사건 석달윤씨의 경우, <국가보안법 피해자 증언대회 자료집>, 2004년)
물론 모든 의사가 불의(不義)했던 것은 아닙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당시 박군의 시신을 부검했던 부검의 황적준 박사는 경찰이 이 사건을 은폐하려 하자 자신의 일기장을 공개하고 사직서를 냄으로써 은폐 사실이 드러나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 의사회는 칠레나 필리핀처럼 사과 성명 하나 낸 적이 없으며, 고문에 협조한 의사들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한 바 없습니다. 이른바 '온정주의'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라도 의사회는 어두운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 고문에 가담한 의사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는 물론 의사회 차원의 반성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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